[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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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pisodes

  • 245회 사상 첫 해외이민 우리 문화재 ‘책가도’
    1만원권 지폐 앞면에 세종대왕의 초상화 뒤에 용비어천가의 ‘뿌리깊은 나무…’ 구절과 함께 심상치 않은 그림이 보인다. 바로 일월오봉도이다. 해와 달, 다섯봉우리, 소나무와 물 등을 그린 일월오봉도는 왕권의 상징이자 군왕의 분신이며 동일체로 여겨져 언제나 조선 임금의 어좌 뒤편에 걸려 있었다.
     일월오봉도가 왜 왕관의 상지이자 국왕의 분신이라 했을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연구자들은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시가집인 <시경>의 ‘천보’라는 시에서 묘사된 9가지 자연현상을 인용한다. 즉 여기에 등장하는 다섯봉오리는 하늘이 내린 왕을 보호하는 물체를 일컬고, 나머지 4개, 즉 해와 달, 소나무, 물 등은 통치자가 자신의 미덕을 발휘하는 법을 보여준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이것들이 임금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일월오봉도는 항상 왕의 뒤에 놓이고 죽을 때도 같이 묻는다고 한다. 병풍만 걸려있다면 완성된 그림이 아니고 반드시 왕이 앉아있어야 완성된 그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1만원권 지폐에 세종대왕 초상화 뒤에 일월오봉도 병풍이 걸려있는 것이다.
     그런데 1791년(정조 15년) 조선의 중흥군주라는 정조(재위 1776~1800)는 군왕의 상징그림이라는 ‘일월오봉도’를 내리고 이른바 책가도(冊架圖) 병풍을 내걸었다. 책가도가 무엇인가. 책장과 서책을 중심으로 하여 각종 문방구와 골동품, 화훼, 기물 등을 그린 그림이다.
    31 min
  • 244회 궁중공연의 프로듀서 '꽃미남' 효명세자
    효명세자는 태어날 때부터 할아버지인 정조 임금을 빼닮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세자는 이마가 솟은 귀한 상이었고, 용(龍)의 눈동자로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 궁내의 모든 이들이 ‘장효왕(정조)과 흡사하다’고 입을 모았다.”(〈순조실록〉)
     〈순조실록〉은 세자의 비범함을 증거하는 일례를 든다. 즉 세자로 책봉된 4살 때(1812년) 홍경래의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젖을 먹고 있던 세자가 웃으면서 ‘쾌(快)하고 좋구려!’라 말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유모가 ‘무엇 때문이냐’고 묻자 세자는 ‘도둑이 벌써 잡혔으니 어찌 쾌하고 좋지 않겠느냐’고 대꾸했다는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밥을 먹다가 밥알을 떨어뜨리면 반드시 주워서 삼키면서 “하늘이 내려 준 것을 소홀하게 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세손(헌종)이 비단 때때옷을 입자 “나도 입지않는 비단옷을 입히느냐. 빨리 고치도록 하라”고 꾸짖었다는 일화가 인구에 회자됐다.
    39 min
  • 243회 청동기 마을 유적에 레고랜드?
    지난 2011년 강원도 춘천 중도에 블록장난감(레고)를 테마로 한 이른바 레고랜드 테마파크를 조성한다는 계획이 수립되면서 중도유적은 개발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사업추진을 위해 시행된 발굴조사에서 총 3300여기의 청동기 시대 유구가 나왔다.
    서양의 플라스틱 놀이기구 공원을 세운다는 계획을 접고 청동기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유적공원으로 용도를 바꿀 수도 있었다. 무작정 보존만 외칠 게 아니라 활용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는 논리가 등장했다. 개발계획은 강행됐다.
    35 min
  • 242회 양녕대군 때문에 죽임 당한 불쌍한 영혼들
    가장 인구에 회자된 이야기는 효령대군과의 일화이다. 즉 양녕대군이 미친 척하니 효령대군이 “장차 형님이 폐위되고 내 차례가 되겠구나”라고 여기고 열심히 글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양녕이 지나다가 들어와 효령대군을 발로 차면서 “어리석다. 넌 충녕에게 성덕이 있는 것을 모르느냐”고 했다는 것이다.(〈연려실기술〉 ‘양녕대군의 폐위’)
    〈태종실록〉(1446년 4월23일)에는 이런 일화도 등장한다. 불심이 깊은 효령대군의 양주 회암사 불사(佛事)에 참여한 양녕대군이 사냥으로 잡아온 고기를 씹고 술을 마셨다는 것, 그리고 부처님에게 절을 올리던 효령대군이 ‘형님께서는 오늘만이라도 술과 고기를 그만 두라’고 정색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양녕대군의 한마디는 기가 막혔다는 것이다.
     “나는 복이 많다. 살아서는 왕(세종)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효령대군)의 형이 될 것이니….”
    36 min
  • 241회 왕희지의 재림을 몰라본 중국인들
    어느날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빈관에 머물고 있던 홍관을 찾은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송나라 한림대조 양구와 이혁이었다. 홍관이 김생의 ‘행초(行草·행서와 초서)’ 한 권을 보여주자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야 오늘 여기서 왕희지의 글씨를 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네.” 두사람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러자 홍관은 손사래를 치며 “이것은 왕희지의 글씨가 아니라 신라 사람 김생이 쓴 것”이라고 고쳐주었다. 하지만 양구와 이혁은 ‘우릴 놀리냐는 듯’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에이, 놀리지 마세요. 천하에 왕희지를 빼놓고 어찌 이런 신묘한 글씨가 있습니까. 말도 안됩니다.”
    홍관이 “아니다 진짜 김생의 글씨다”라고 몇번을 말했지만 두사람은 ‘농담하지 마라’는 듯 웃어넘겼다. 〈삼국사기〉 ‘열전·김생전’이 소개한 일화이다. 중국인들이 김생의 글씨를 보면서 ‘왕희지의 재림’이라고 놀라면서도 끝내 신라인 김생의 글씨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9 min
  • 240회 인종의 ‘절친’ 김인후는 왜 해마다 7월1일 대성통곡했을까
    “타고난 성품이 맑고 순수했다. 5~6세 때에 문자를 이해하여 사람을 놀라게 했고…용모만 바라보면 속세 사람같지 않았다. 마음이 관대하여 남들과 다투지 아니했으며, 예의와 법도를 실천했다.”
    1560년(명종 16년) 1월16일 〈명종실록〉이 기록한 하서 김인후(1510~1560)의 졸기(부음기사)다. 절대 다수의 〈실록〉 부음기사는 고인의 잘잘못을 엄정하게 따졌지만 김인후의 졸기는 그야말로 찬양일색이다.
    39 min
  • 239회 '피골이 상접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사진에 투영된 독립투쟁사
    세월을 달리한 도산 안창호 선생(1878~1938)의 사진 3장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첫번째 사진은 일제강점기 대정 연간(1919~1926년)의 요시찰 인물 감시 카드 양식에 붙여놓은 것이다. 1919년 당시의 자신만만한 안창호, 즉 시쳇말로 ‘리즈’ 시절의 사진이다. 1932년의 사진은 일제경찰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수감 되었을 때의 수형카드이다. 깡마르고 다소 초췌하지만 나름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봐줄만 하다. 1937년 사진을 보면 억장이 무너진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재차 체포된 도산이 모진 심문과 함께 혹독한 형무소 생활을 버텨내던 도산 선생의 모습이다. 너무도 늙고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다.
    37 min
  • 238회 홍길동전은 대체 누구의 작품인가
    ‘홍길동전은 허균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금까지 ‘홍길동전의 작자=허균(1559~1618)’이라는 등식은 공리처럼 여겨졌다. 그와 함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전의 명대사는 풍운아 허균이 창조해낸 조선시대 ‘적서차별’의 상징말로 일컬어졌다.
    하지만 최근 허균과 거의 동시대 인물인 지소 황일호(1588~1641)이 쓴 홍길동의 간략한 일대기가 존재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26 min
  • 237회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의 훈장과 의열단 의백 김원봉의 ‘빨갱이’ 딱지(하)
    김원봉 선생은 1946년의 총파업과 10월 대구 항쟁, 그리고 남로당 결성 등을 거치면서 미군정의 철저한 반공정책의 속죄양이 되어 탄압받았다. 급기야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수갑을 차는 등 씻을 수 없는 수모까지 당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노덕술에게 체포되었을 당시 선생의 22살 연하 부인인 최동선은 출산이 임박한 만삭이었다.
    35 min
  • 236회 의열단 ‘의백’ 김원봉은 뼛속까지 민족주의자였다(상)
    김원봉 선생이 누구인가. 1920년대 이후 김구 선생과 함께 중국내 독립운동의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는 분이다. 선생의 이름은 12개나 된다. 김약산, 최림, 진국빈, 이충, 김세량, 왕세덕, 암일, 왕석, 윤봉, 김국빈, 진충, 김약삼 등이다. 그만큼 천의 얼굴로 신출귀몰 일제와 싸웠다는 뜻이다. 1918년 중국으로 건너간 선생은 폭력투쟁만이 조국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굳혔다.
    35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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