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2년 4월21일 평안도 지방을 돌던 박래겸이 어느 마을을 지날 때였다. 길가 집에서 “젖 달라”고 우는 갓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박래겸은 귀를 쫑긋 세웠다. 아이를 달래던 할머니가 “울지 마라. 암행어사 오신다.”고 하지 않은가. 넌지시 할머니에게 물었다.
“아이가 어찌 암행어사가 무서운 줄 안단 말이오?”
“말도 마시오, 요즘, 이 고을에 암행어사가 출두한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 소문 때문에 관리들과 토호들이 벌벌 떨고 있다오.”
할머니가 내친김에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암행어사가 평생 두루 다녔으면 얼마나 좋겠소. 그래야 가난한 마을의 힘없는 백성이 그 덕택으로 살게 아니겠소.”
그랬다. 바로 할머니의 토로가 바로 순조 임금의 밀명으로 125일간 4915리(2064~2654㎞)의 발품을 팔며 평안남도 암행어사의 직분을 감당한 이유이다.
박래겸이 암행어사의 체험담을 꼼꼼히 기록한 〈서수일기〉에는 19세기 초 백성들의 생생한 생활상과, 당대의 모순을 바로잡으려 했던 ‘어느 암행어사의 분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