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근태 선생!
한 평생 민주화에 헌신한 김근태 선생이 운명을 달리 했다.
정치인이니 고문, 의장 어쩌고 하는 당직이 있었고 장관도 역임했으니 전직 장관이라 부를 수도 있지만 떼어버리자.
김구 선생, 조봉암 선생, 장준하 선생, 장일순 선생 ...... 이제 그 반열에 그를 올려놓아야겠다. 60년대에 경기고를
나와 서울대 경제학과에 들어갔고, 머리 좋고 공부 잘하고 리더십 있었으니 대단한 CEO가 되고도 남았을 것을 참 바보같이
살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러면 선생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
대학생 때부터 수사기관에 쫓기고 붙잡혀 고문당하고 투옥되는 통에 어둠 속에서 젊음을 보냈다. 거리를 마음대로 활보하며
자유롭게 햇볕을 쬘 수 있게 되기까지 걸린 세월이 20년. 그러고도 몇 년을 더 재야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 정계에 진출했다.
구치소 감방에서 변호인 접견실까지, 뚜벅뚜벅 걸어 3분이면 되는 거리를 30분이 걸렸다고 한다. 온갖 고문과 폭행으로 몸이
온통 찢겨 접견실까지 기어 나온 것이다. 그렇게 고문을 당하면서 시계도 없는데 고문당한 날짜, 고문시각과 시간, 고문담당자
이름, 고문방법 등을 어떻게든 기억하고 새겨두었다 폭로하는 방식으로 싸웠다. 경찰에 쫓기면서도 싸우고 고문당하면서도
싸운 이름 그대로 민주화 투사였다.
정치인으로 승승장구 못한 이유도 그런 맥락이다. 김대중 정권 시절에 동교동계를 해체하고 계파정치를 추방하자고 외치면
어쩌자는 건가. 노무현 정권 때는 대통령에게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토론해 보자’며 덤벼들었다. 그러니 출세를 못하지.
지난 여름에는 주위 사람들 부축을 받아야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힘든 몸인데도 희망버스에 올라 부산 한진중공업을
다녀왔다. 민주주의를 위한 야권통합을 호소하다 떠났다.
정의로운 사회는 늘 갈망이다. 갈망을 현실로 바꾸는 길목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등장한다. 다른 이를 위해 앞장 서 행동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걸리운다. 모두가 나서 민주주의를 바로 세울 때까지 정의로 가는 길목에는 늘 크고 작은 십자가가 세워져
너와 나, 우리를 핍박할 것이다. 아무렴 어떠랴. 내 영혼이 쫄지 않는데.